서로 다른 세 나라가 만든 세 우주탐사선이 지난달 10일부터 19일 사이에 나란히 화성에 도착했다. 첫 우주선은 아랍에미리트(UAE) 화성 탐사선 ‘아말’이었다. 우리말로 희망이란 뜻의 ‘아말’은 10일 오전 12시 57분에 화성 궤도에 진입했다. 중국 탐사선 ‘톈원(天問) 1호’이 뒤를 이어 화성 궤도에 들어섰고, 미국 나사(NASAㆍ미항공우주국) 화성 탐사 로버 ‘퍼서비어런스(Perserverenceㆍ인내)’도 화성 표면에 착륙했다.
잇따른 화성 탐사 프로젝트 성공 소식 중 놀라운 점은 미국, 중국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 UAE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구 989만명(2020년 추정), 남한 면적의 83% 크기에 불과한 작은 나라 UAE가 어떻게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까.
UAE 부통령 겸 총리를 맡은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두바이 군주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내 할아버지는 낙타를 탔다. 하지만 나는 벤츠를 탄다. 내 아들은 랜드로버를 타지만, 그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타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 왔다. 석유가 고갈되면 국가 경쟁력이 한순간에 무너질까 우려한 것이다. 특히 그는 미래를 책임질 UAE의 청년 세대가 도전 의식 없이 안이한 태도를 지닐까 염려했다.
모하메드 빈 라시드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으로 이를 타개하려 했다. UAE가 우주 개발에 나서는 이유다. 그는 2019년 건국 48주년 기념식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리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세상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전 의식을 끊임없이 불어넣은 것처럼, 우리도 어린 세대에게 계속해서 미래를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두바이 군주이자 UAE 총리 취임 직후인 2006년, 자신의 이름을 딴 모하메드 빈 라시드 우주센터(MBRSC)를 설립하고 우주 개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시 UAE는 우주 과학자는커녕 기반 시설도 하나 갖추지 못한 우주 과학 불모지였다. 첫 번째 우주 개발 프로젝트는 상대적으로 난도가 낮은 소형 인공위성 개발이었다. UAE는 당시 소형 인공위성 분야 세계 3대 업체인 영국 서리(Surrey) 대학의 SSTL, 유럽 연합의 에어버스, 그리고 한국의 쎄트랙아이를 두고 고민했다. (지금은 에어버스가 SSTL을 인수했다.)
UAE는 고민 끝에 우주 개발의 첫 스승으로 한국을 낙점했다.
한국 역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위성 불모지였다. 고 최순달 KAIST 명예교수가 1989년 학생 20명을 위성 선진국인 영국 서리 대학과 런던 대학에 유학 보냈다. 그 학생들이 돌아와 1992년 우리나라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쏘아 올렸다. 학생들은 1999년 위성 벤처기업 쎄트렉아이를 세웠고 세계 일류 기업으로 키웠다.
UAE는 위성 기술을 배워서 완전 자립화를 이룬 한국의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문화까지 흡수하기를 원했다. 2006년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공부했고, 현재는 화성 탐사 프로젝트 총 책임자를 맡고 있는 옴란 샤라프는 현지 인터뷰에서 “모든 옵션을 검토할 때 한국이 기술 이전에 최적지였다”며 “한국도 영국에서 기술을 가져와 자립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UAE 유학생 10여 명은 2006년부터 8~10년간 쎄트렉아이에서 인공위성 기술뿐 아니라 프로젝트 프로세스, 과학 행정 분야까지 섭렵했다. 그중 2년은 KAIST에서 공부하며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유학생이었던 수하일 알 메이리는(화성 탐사선 프로젝트 우주선 개발팀장) “첫 점심으로 회를 먹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먹는 거라서 그런지 정말 쇼킹했다. 그 후 어떤 걸 먹든 전혀 문제가 안 됐다”고 한국 생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들은 2009년 두바이샛 1호, 2013년 두바이샛 2호, 2018년 칼리파샛 발사를 차례로 성공시켰다. 프로젝트 하나를 마치기 전에 다음 프로젝트에 돌입하는 속도로 기술을 익혀나갔다. 칼리파샛은 100% 자체 기술로 쏘아 올렸다.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던 시점인 2013년 말 모하메드 빈 라시드 총리는 샤라프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건국 50주년인 2021년까지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완성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샤라프는 “화성에 가는 건 지구에 위성을 띄우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있던 국가들도 화성 탐사 계획의 절반은 실패했다”며 의문을 표했지만, 총리의 뜻은 확고했다.
모하메드 빈 라시드 총리는 2014년 7월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겠다고 세계에 공표하고 9월 UAE 우주청을 설립했다. 인재 수급을 위해 자국 대학에 기초과학 학과도 신설했다. 우선 목표부터 공표하고 준비를 시작하는, 우주 개발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세계 과학계는 UAE의 목표 달성 가능성을 매우 낮다고 내다봤다. 위성 기술 정도만 가진 우주 산업의 신출내기 국가가 10년 이내에 다른 행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만㎞ 상공에 지구 궤도에 위성을 안착시키는 것과 우주 공간을 수억㎞ 날아가 행성 궤도에 정확하게 진입시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당시 UAE 화성 탐사 프로젝트 인원은 70여명(현재는 200여명). 총 책임자가 30세였고, 전체 평균 연령은 27세였다. 프로젝트 전체 인력 중 여성이 34%였으며, 과학 인력 중에선 무려 80%가 여성이었다. 행성 간 우주탐사 프로젝트를 경험한 인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국에서 유학했던 청년들은 2014년, 이번엔 미국으로 향했다. 나사 출신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콜로라도대 볼더 캠퍼스 대기우주물리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애리조나 주립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등에서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하메드 빈 라시드 총리는 “돈으로 기술을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스스로 개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을 끌어올리라”고 당부했다.
나사의 터프하고 도전적인 문화와 UAE 청년들의 열정은 합이 잘 맞았다. 당시 UAE 청년을 이끌었던 나사 출신 베테랑 엔지니어인 브렛 랜딘은 과학전문지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UAE 청년들과 일한 건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던 경험”이라고 말했다.
젊은 UAE 과학자들은 화성 탐사 프로그램을 분석하는, 나사 주도의 국제 포럼에도 참석했다. 당시 나사도 화성 지표면 로봇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UAE는 다양한 과학자 집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포럼에 참석했던 UAE 우주과학자 파트마 루타는 “처음에는 히잡을 쓴 저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봤다”며 “하지만 연구를 같이 진행하면서 과학자들도 우리 과학자들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7년의 노력 끝에 UAE는 모하메드 빈 라시드 총리가 공언한 대로 2020년 7월 일본 다네가시마우주센터에서 화성탐사선 '아말'을 발사했다. 아말이 탑재된 발사체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제작한 로켓 H2A였다. UAE는 이미 개발된 발사체를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판단해 발사체 개발은 하지 않았다.
마침내 올 2월 10일 '아말'은 화성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당초 목표대로 건국기념일인 12월 2일 이전에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이다. 미국, 구소련, 유럽, 인도에 이어 세계 5번째 대기록이다.
UAE 화성 탐사 프로젝트의 목표는 화성의 1년인 687일 동안 화성 전체 대기를 관측해 날씨ㆍ기후 지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탐사선은 고해상도 다중 대역 카메라, 자외선 분광계, 열 적외선 분광기와 같은 초정밀 과학장비를 싣고 화성 상공 최단 2만㎞, 최장 4만3000㎞의 타원 궤도를 돈다.
UAE의 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2017년 모하메드 빈 라시드 총리는 “100년 뒤인 2117년 화성에 시카고 크기의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1억3600만 달러(약 1560억원)를 투자해 사막 18만㎡ 위에 화성을 그대로 재현한 돔형 구조물을 만들 계획이다. 화성의 기온, 기압, 중력, 토양을 그대로 갖추고 연구팀이 1년 동안 생활하면서 인간과 식물의 생존 가능성을 실험한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모래 왕국 UAE의 리더십과 그늘
화성 궤도에 처음으로 탐사선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건 1971년 11월 13일의 일이다. 미국 나사가 제작한 ‘매리너(Marinerㆍ항해자) 9호’가 화성 궤도에 진입한 뒤 궤도를 돌며 화성 표면의 약 80%를 촬영해 사진 7329장을 전송했다. 태양계 최대 화산인 올림푸스산, 길이 4000㎞의 매리너 계곡의 존재를 처음 알린 탐사선이다. 임무는 종료됐지만 여전히 화성 궤도를 돌고 있는 중이다.
매리너 9호가 화성 탐사를 시작한 지 19일 뒤인 1971년 12월 2일 UAE가 건국됐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아부다비의 군주(에미르)인 셰이크 자이드 알 나흐얀이 지역 7개 토후국을 하나로 묶어 연합국을 세웠다. 처음엔 카타르와 바레인도 연합에 참여하려 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해 따로 나라를 이뤘다. 우리나라 면적의 83% 크기인 UAE는 국토의 85%가 사막이다. 1900년대 초까지 각 토후국들은 진주와 대추야자를 팔아 연명했다. 이후 아부다비에서 석유가 발견됐다. 거대한 유전을 통해 부를 거머쥐게 되자 아부다비의 군주인 셰이크 자이드가 작은 나라들을 모아 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건국 이래 UAE 대통령은 아부다비 군주가 맡고, 총리 겸 부통령은 두바이 군주가 맡아 왔다. 내각 요직도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왕실 인물들이 장악했다. 셰이크 자이드는 임기 동안 석유로 얻은 막대한 부를 허투루 쓰지 않고 사회 인프라를 확충하고 교육ㆍ보건ㆍ행정 서비스에 투자해 국가의 내실을 키웠다. 70년대 우주 개발에 전념하던 나사의 우주 비행사와 과학자들을 초청하면서 우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모하메드 알 아흐바비 UAE 우주청장은 “UAE 지도자들이 자이드 대통령의 노력으로 우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의 노력과 지원에 힘입어 수많은 UAE 학생들이 해외로 유학을 나갔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셰이크 자이드 대통령이 서거한 2004년부터 우주 개발을 향한 UAE의 꿈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쇠뿔을 단김에 뽑듯 우주 개발 프로젝트 착수를 지시한 건 두바이의 군주이자 총리 겸 부통령인 셰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이었다. 2006년 취임한 그의 화두는 기존 석유 경제에서 지식 기반의 경제로의 신속한 전환이었다.
지금 두바이 모습을 보면 모하메드 빈 라시드의 큰 그림이 보인다. 두바이는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담당 장관을 신설했다. 세계 최초로 3D프린팅으로 만든 사무용 건물도 세웠다. 경찰관 없는 스마트 경찰서를 만들었으며 드론 택시도 상용화할 예정이다.
UAE는 군주제 국가의 연합인 만큼 리더십의 결정과 드라이브에 따라 다른 민주주의 국가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인권 문제와 왕실의 전횡 같은 그늘도 분명하다.
화성 탐사선 성공 소식이 들려온 며칠 뒤 UAE발 충격적인 뉴스가 세계에 퍼졌다. 모하메드 빈 라시드의 딸인 라티파(35)가 “나는 인질로 잡혀 있다”며 감금 사실을 폭로한 영상이 BBC를 통해 공개됐기 때문이다. 라티파는 지난 2018년 UAE를 빠져나와 해외로 도주하려다 해상에서 붙잡힌 뒤 행방이 묘연했다.
영상 통화로 비밀 연락을 주고 받은 지인이 BBC를 통해 지난 2년 간의 영상을 공개했다. 라티파는 영상에서 “감옥으로 개조된 빌라에 갇혀 있다. 경찰 5명이 밖에서 2명이 안에서 지키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을 것이라 협박한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5일(현지시간) 영국에선 모하메드 빈 라시드가 딸 샴사와 라티파 공주의 납치 사건을 사주했다는 내용의 법원 결정문이 공개되기도 했다. 」